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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태수] 어느 수의사의 일기 69편 - 부루마블
작성자 권영항 조회 5,740
등록일 03-05-14 13:08
내용 [나태수] 어느 수의사의 일기 69편 - 부루마블

사스에.... 화물연대 파업에..... 북핵문제에....

어수선한 즈음, 비는 유난히도 별스럽게 내리고 있다.

오늘은 민족영웅 충무공 어르신의 가르침을 받잡아, 유비무환(비가 오는 날은 환자가

없다!)으로 인해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래서,

간호사님들과 여름맞이 준비(에어컨 청소, 난로의 창고복귀 등)를 같이, 성실히, 골고

루, 세밀히 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하는 척만 하고 요리조리 뺀질 거리다 상어아가씨에게 대빵 쿠사리를 먹었

지만.....

(아주 가끔은 누가 원장인지 모르겠다 ㅠ.ㅠ 무서운 원무과장....헐..)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모두 모아 놓고 가위바위보를 시켰다!

갑작스런 명령하달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들 모이긴 했는데, 그 와중에

도 상어아가씨는 '저인간이 또 무슨 장난을 치나'하는 얼굴로 접수실 컴터 앞에서 꼼

짝도 안하고 부드럽게 째려 본다.

첫번째 가위바위보에서 실장님이 졌다.

다들 진 사람에게 무슨일이 발생할까 싶어, 동그란 토끼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더욱 심각한 표정에, 목소리를 깔으며....

"실장님, 졌으니깐 에어컨 청소 스프레이 사와요"

피..... 다들 실망한 얼굴이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실장님을 제외한 사람들(물론 나도 포함)이 다시 가위바위

보를 했다.

이번엔, 심간호사가 졌다.

"심간호사, 부루마블 사와! 능력껏, 큰 걸루. 어디서 파는지 잘 모르지만..... 요밑에

완구점에서 팔더라, 얼마인지 잘 모르겠지만....... 15,000원 이야. 30,000원 줄테니까

.......부루마블2탄도 같이 사와. 물론 잔돈 29,900원은 남겨와야 해!"

모두들 폭소를 터뜨린다.

비가와서 꿀꿀하고, 대청소 할려니깐 멍멍(?)하고, 비맞으며 밖에 나가려니 야옹(?)

하던 기분들이 한마디에 모두 풀린 것 같다.

내가 정신연령이 낮은 것인지, 같이 일하는 병원식구들의 정신연령이 높은 것인지 정

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린 시절에 부동산투기(?)를 하며 놀았던 좋은 기억들은 서로

공유하고 있었나 보다.

다만, 한사람(누구인지 밝힐 수 없지만, 일명 상어아가씨라고 하면..... 안되고 원무과

장)만이 '으이그.. 당신께서 하는 일이 그렇지!' 하는 표정이다.


사실, 나는 남의 밑에서 꽤 많이 일해보았다.

가끔 쉬고 싶은날 혹은 쉬는 시간에 상급자가 일 시키면 그렇게 짜증 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왕 하는 일 웃으면서, 즐겁게 해야지.

이런 기억이 남아서 인지, 내가 원장이 되자 병원식구들에게 지시하는 것이 웬지 어

렵다.

그래서 지시를 내리기전에 원무과장과 의논한다.

가장 식구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가장 즐겁게 생활할 수 있도록 말이다.


심간호사나 황간호사 실장님 모두 나와 띠동갑에 가깝고, 간호사와 수의사와의 관계이

다 보니 아무래도 내가 어려울것이다.

그렇다고 나도 어려워 하고 식구들도 어려워하면 병원생활 참 재미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것이 바로 부루마블 게임이다.

쿵쿵따는 이미 순발력이 바닥난 내가 하기는 너무나도 고난위도를 자랑하고, 고스톱이

나 포커게임은 하우스(?)로 오해를 살 공산이 크고, 바둑이나 장기는 2명 밖에 하지 못

하는 단점이 있고, 나이트 클럽은 물주(? 나)가 퇴짜맞기 때문에 불가능 하므로, 무엇

으로 이들을 즐겁게 할까하는 고민끝에 이 게임을 떠올렸다.


효과는 기대이상이었다.

비에 양말을 흠씬 젖어서도 웃으며 들어오는 심간호사의 얼굴에서,

입원장의 청소를 위해 땀을 흘리는 황간호사의 입가에서도,

에어컨의 먼지를 때밀듯 닦고 있는 김실장의 뒷모습에서도,

나 대신 온라인 답변 쓰느라 얼마남지 않은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강준태 수석 수의사

의 손가락에서도 흐뭇함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뭐하고 있었냐구요?

상어아가씨의 눈치에 못이겨, 여기저기 찝적거리면서, 도와주는 척하면서, 가위바위보

에서 한번도 지지 않는 황간호사와, 가위바위보 왕을 정할 출전기회를 노리고 있었지

요.

(근데, 졌습니다. 황간호사 win 입니다.)

부루마블 판에 놓인 말처럼 인생은, 주사위에 의해 한걸음 한걸음 종착역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간에 무인도에 빠져 3번을 쉴때도 있고,

콜롬비아호를 타고 원하는 곳을 갈수 있을 때고 있고,

몇바퀴를 돌아도 원하는 땅을 가질 수 없을 때도 있고,

황금열쇠의 우대권을 얻어 힘든때에 무료로 지나갈수도 있고,

어렵게 지은 건물을 반액대매출에 의해 팔아야 할 때도 있으며,

뜻하지 않게 복권에 당첨되거나 사회복지기금을 받을 때도 있고,

한번 한 실수를 반복할 때도 있으며,

힘들때 은행으로 부터 대출을 받을 수 도 있고,

한때는 부자였다가 파산하기도 하고,

노력해서 모은 돈으로 건물을 짓고 별장 생활을 할 수 도 있으며,

빌려준 돈을 떼이기도 한다.


게임을 하면서 누가 이기고 누가 파산했는지 보다는 우리 모두가 즐거움을 나누어 가

졌다는 기억이 소중한 것이 아닐까?

어떤 삶을 사는가 보다는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내가 즐겨 듣는 노래 가사 중에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라는 소절이 있다.

내가 나의 삶을 살아가면서 진짜로 원하는게 뭘까?

갑작스런 질문에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리라는 페키니즈가 있다.

감기 증상으로 내원했는데, 2일 치료를 받았는 데에도 증상의 개선이 보이지 않는다.

주인에게 홍역이 의심되므로 몇가지 검사를 권해드렸다.

주인은 검사를 받지 않으려 하신다.

조금 후에 이번에는 수석 수의사님이 권한다.

다음날 간호사님이 다시 권유한다.

그러나 주인은 묵묵무답이다.

혹시, 오해를 하실 수 도 있다.

수익의 창출을 위해 우리가 이런 검사를 권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우리 식구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강아지의 질병에 대한 원인파악과 현재의 상태측정,

치료계획의 수립 및 예후의 판별인데 말이다.


나는 주인이 치료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인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때이른 포기가 아닐까하는.....마음에....

자기 변명같지만, 실제로 멀쩡한 강아지를 주인의 편의를 위해 안락사를 요구하는 사

람들이나 치료를 받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도 종종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며칠 내원하시다가 오시지 않으시겠지'


그런데.......

생각과는 다르게 나리 주인은 정해진 날에 정해지 시간에 꼬박꼬박 병원을 찾으셨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나리 주인과 원무과장과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지금 집안 형편상 나리치료비를 감당하기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검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대증치료만 받으시고 있다는...

주인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나리의 회복임을 울먹이면서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의 최선의 카드를 선택한 것이다.


일순간, 병원식구들은 나에게 고개를 돌렸고, 나는 머리를 끄덕여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나 역시 카드를 꺼내 들었다.

황금열쇠의 우대권을 말이다.

방법은 다르지만 우리가 모두 진짜로 원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게임과 삶의 다른점은,

게임은 승자와 패자가 있고 삶에는 승자와 패자가 없다는 거다.

그렇기에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삶이라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으며,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은 최선을 다해 지켜주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병원에서 있었던 게임은 승자와 패자를 떠나 매우 즐거웠다.

사정상 자주 게임을 할 수는 없지만 그 지독한 재미에 따른 후유증으로 결국 다음날

우리집에서 새벽늦게 까지 연장전을 치루어야 했으며,

다들 비가 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됐다.

그것도 억수로 많이 와서 손님이 잘 오시지 않기를 바란다.

(으~ 병원 망할일 있나.....쩝)

더구나 강선생님은 내가 부루마블을 집에 놓고 온 다음날 부터 두꺼운 도화지를 사가

지고 오겠다고 난리다.

왜냐구요?

없으니까 직접 만들어서 하시겠답니다.


카오스 캐비어 권영항 나태수

도 장 ' 꽝 '


PS : 나리는 다행히도 회복이 되었다.

확실히 우대권의 효과는 크다!

강선생님은 짬나는 시간마다 인터넷을 뒤지며, 부루마블에 대해 공부 중이다.

777법칙(주사위 두개를 던졌을 때 가장 자주 나오는 숫자는 7이라는 이론)과

반드시 사야할 땅, 승자가 되기 위한 법칙을 수의학만큼 외우고 있다.

황간호사는 전문용어(?)를 수시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거기 솜 좀 주세요'를 '이곳에 솜 좀 투자(?)해 주세요'로

'알콜을 다 썼네요'를 '알콜 파산(?) 했네요'로,

'종합접종 해주세요'를 '예방접종 건설(?) 해 주세요'로 말이다.

심간호사와 실장님은 짬짬이 기우제(?)를 지내고 있고,

상어아가씨는 두번 연속 파산한 뼈아픈 기억으로 인해 부루마블만 보면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고 한다!

(안돼지요....^^ 그래서 숨겨놓고 있습니다 ^^; 하하하!)


다시 PS : 애견 잡지 [강아지]의 창간 일년을 축하하며, 더욱 발전하시길 기원합니다.

[나태수] 어느 수의사의 일기 70편 - 초보운전
[나태수] 어느 수의사의 일기 68편 - 고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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